[내일(11.3)의 독서 말씀]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채워지는 삶 :필리피서 (2,5-11) 묵상
본문
우리는 살면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젊은 시절에는 이러한 욕망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내어놓았는가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한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그 지위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높아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삶을 보여 주셨다.
이 말씀을 읽으며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연구 성과를 내고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진정한 교육은 교수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임을 깨달았다.
내가 앞에 나서기보다 학생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잃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일 것이다.
정년퇴임 후에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직책과 권한은 내려놓았지만 그동안 쌓아 온 지식과 경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미각해킹』을 집필하고, 식품과학에 관한 강연과 재능기부를 통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내용을 나누고 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업적을 쌓기보다 후배들과 식품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성당에서 봉사하다 보면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때로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청소년분과에서 오랫동안 봉사했던 경험을 돌아보면,
모든 일을 내 생각대로 추진하기보다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역할을 나누는 것이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한 걸음 양보할 줄 아는 자세일 것이다.
바오로는 이어서 말한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이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기회는 많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놓고,
몸이 불편한 사람의 걸음에 맞추어 함께 걸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작은 자기 비움이다.
45년 넘게 부부로 살아오면서도 서로의 생각이 언제나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임을 새삼 느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참된 높아짐은 자신을 내세우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는 삶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나누면서도 은연중에 대가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월이 쌓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조금씩 비워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넓혀 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비운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욕심과 교만을 덜어내어 그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는 일일 것이다.
남은 삶에서는 더 높은 자리보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낮은 자리에 머물고 싶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