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내일(10.29)의 독서 말씀]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 : 에페소서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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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이 저의 묵상을 읽고 느낀 점을 답신으로 보내와 여기에 소개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만난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고,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분노하거나 좌절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마치 적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념과 계층, 젠더와 세대의 차이로 갈등이 깊어지면서 서로를 쉽게 적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특정한 사람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미움과 거짓, 이기심으로 이끄는 악의 세력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악이며, 그 싸움은 인간적인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해 온 벗들이다.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으니 어느덧 60년 넘은 세월을 함께한 녀석들이다. 반면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는 한 명도 없고, 그 시절의 기억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도 편하게 만나고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기회도 많지 않을뿐더러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오랜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더욱 싫은 일이다.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 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만나기가 껄끄럽고, 만남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로 호불호가 있을 수는 있어도 친구를 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혹시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마저 든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생각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이념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도 큰 어려움 없이 만나 왔다.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기보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판단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반대편에 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는 말이 설마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도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체 대화방에서도 격한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이 몇몇 사람의 다툼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번져 간다는 사실이다. 대화는 줄어들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배려도 사라지는 듯하다. 친구가 나를 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내게도 현실로 다가왔다. 직장 동료나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와는 생각이 맞지 않으면 거리를 두면 그만일 때도 있다. 더 이상 만나지 않으면 관계가 자연스럽게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 친구는 다르다. 단순히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수십 년의 인연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념이나 계층, 젠더나 세대의 차이를 의식하기 훨씬 전에 만났고, 서로의 젊은 날과 삶의 흔적을 함께 나누며 살아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 허물없이 지내 온 친구들을 생각의 차이만으로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며, 어디서부터는 나의 생각을 분명히 밝혀야 할까. 무엇보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신념을 지킬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직은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묵상은 나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과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돌아보게 한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와의 우정 문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평화의 신발을 신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에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때로는 말씀과 다르게 행동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고도 서운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말씀은 나의 부족함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나는 어려움이 생길 때 다른 사람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부터 돌아보고 있는가. 진실보다 체면을, 평화보다 자존심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나 역시 미움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힘이나 폭력이 아니다. 거짓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과 정직한 삶, 분쟁이 있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 악의 유혹을 이겨 내게 하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 모든 무장 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악에 맞서라고 가르친다. 오늘의 묵상은 내게 세 가지를 일깨워 준다. 첫째, 사람 자체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의 잘못된 말과 행동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미움과 분열을 부추기는 이기심과 거짓에 맞서되,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까지 이르지는 말아야 한다.
둘째, 세상의 거짓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질주의와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거세게 밀려올수록 자신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 갈등을 부추기는 곳에서는 화해의 길을 찾고,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셋째, 나 혼자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개인주의가 깊어지는 사회일수록 이웃의 연약함을 품고, 서로의 부족함을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무엇이 옳은지 잘 알려 준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내게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내가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친구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나를 적처럼 대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친구들을 계속 만나야 할까, 아니면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할까. 우정을 지키기 위해 침묵해야 할 때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 솔직하게 말해야 할 때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 내가 어찌 그 견고한 기득권의 벽과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분열의 구조에 맞설 수 있겠는가.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의 말씀은 내가 세상의 모든 악을 물리쳐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미움에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거짓에 동조하지 않으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뜻일 수 있다. 친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과 나의 신념을 지키려는 마음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친구의 생각을 모두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랜 세월 쌓아 온 우정을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다. 어쩌면 내가 지금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친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는 함께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내 마음속의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하느님, 제가 친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 않게 하시고, 진실을 지키면서도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지혜를 주소서. 제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갈등 앞에서 좌절하기보다, 제 곁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부터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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