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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1-18을 묵상하며]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

제임스
1시간 16분전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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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

— 사도행전 11,1-18을 묵상하며


인간에게 식사는 단순히 영양을 공급하는 행위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지만, 문화적으로 식사는 관계를 맺는 행위이며, 신학적으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상징이다. 누구와 함께 먹는가는 곧 누구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는가를 의미한다. 그래서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식탁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관계의 공간이었다. 

유다인들에게는 이 의미가 더욱 특별하였다. 그들은 음식 자체를 거룩과 속됨의 기준으로 구분하였고, 누구와 식탁을 나누는가에 따라 공동체의 경계가 정해졌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친교가 아니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선언이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식사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신자들이 그를 비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 어찌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들의 분노는 단순한 율법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이 어찌 우리와 그들을 같은 식탁에 앉힐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식탁은 언제나 경계를 만든다. 누가 초대받는가, 누가 배제되는가, 누가 상석에 앉는가, 누가 구석에 머무는가. 한 공동체의 진짜 모습은 회의실보다 식탁에서 더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사실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그토록 큰 스캔들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분은 말씀만으로 사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식탁을 나누심으로써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셨다. 


식탁은 말보다 강한 환대의 언어다. 

“당신은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식탁이 가진 복음적 의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환시는 단지 부정한 음식이 정결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제 ‘먹을 수 없는 음식’뿐 아니라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까지도 깨끗하게 하셨다는 선언이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사람을 인간이 더럽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식탁 공동체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같은 제대 앞에 모여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개인의 경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빵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일상의 식탁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가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분열된 것인가. 


성당 안에서는 “형제자매님”이라 부르면서 삶의 자리에서는 학력으로, 경제력으로, 지역으로, 정치적 성향으로, 혹은 신앙의 열심 정도로 보이지 않는 식탁의 경계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는 늘 중심에 앉고, 누군가는 늘 주변에 머문다. 누군가는 환영받고, 누군가는 어색한 손님으로 남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식탁은 그렇지 않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을 먹이실 때 사람들의 자격을 먼저 심사하지 않으셨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당신을 배반할 유다까지 식탁에 앉히셨다. 

하느님의 식탁은 완전한 사람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그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영적 선언이며, 그에게 하느님의 자리를 내어 주겠다는 신앙 행위이다. 


한국 문화에서도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친밀함을 표현할 때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한다. 미운 사람과는 밥을 먹지 않는다. 식탁은 관계의 온도를 보여 준다. 

어쩌면 신앙생활 역시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아느냐보다 내 식탁에 누가 앉을 수 있는가로 평가받을지 모른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내게 상처를 준 사람,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 교회 안에서 어색하게 떠도는 사람들까지 내 식탁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베드로는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고백은 곧 이런 뜻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이를 내 식탁에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단지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식탁에서 드러난다. 

오늘 우리의 식탁을 돌아본다. 

우리 집 식탁은 누구에게 열려 있는가. 우리 공동체의 식탁은 누구를 환대하는가. 나의 마음은 누구를 여전히 배제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신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마라.” 

어쩌면 신앙의 성숙은 하느님의 식탁이 넓어지는 만큼 내 식탁도 넓어지는 데 있는지 모른다.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한 끼를 나누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차별 없이 흐른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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