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성당 앞에 서서
본문
– 순교의 기억, 그리고 그 숭고한 시간들
전주 한복판, 나는 고요히 전동성당 앞에 섰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낯설지 않은 성당은, 단지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곳은 말 없이도 말하는 성지(聖地)였고, 침묵 속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시간의 그릇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다 보니, 기도를 하려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는지,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톨릭 신자임을 조심스레 밝히고 나서야, 조용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야고보, 아가다, 안젤라, 아드리아, 레이몬드 라고
이곳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자리이다. 1791년 신해박해의 칼날 아래에서, 그들은 복음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후에도 유항검, 이경언, 이순이… 이름도 다 외지 못할 수많은 이들이, 이 작은 전동 마을에서 하늘을 향한 믿음 하나로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냈다.
1891년, 프랑스에서 온 부두리 신부는 이 땅에 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신자도 부족했고, 재정도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성직자금과 후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은 것은 다름 아닌 이 지역의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벽돌을 구워가며 하나하나 성전을 쌓아올렸다. 신앙은, 그렇게 함께 지어 올린 삶의 기념비였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어우러진 전동성당의 건축미는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나에게는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이야기들이 더 숭고하게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성당 마당을 걸었다. 피에타 상 앞에 다다르자, 품에 안은 손주를 바라보며 문득 마리아의 고통에 조심스레 마음을 얹어본다. 그 잃음과 기다림, 그 사랑은 지금도 이 자리에 살아 있다.
벽돌 하나하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가 깃들어 있었고,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드는 빛마저도 성스럽게 느껴졌다. 순교자의 피는 흙이 되었고, 그 흙 위에 자란 믿음의 나무는 지금도 우리를 조용히 이끌고 있다.
이 성당은 단지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과, 숭고한 삶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장소다. 전동성당 앞에 서면, 문득 나의 삶과 신앙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길을 따르는 것인가.
순교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 고요한 성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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