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1)의 독서 말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 욥기 (19,21-27)
본문
사람이 가장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보다 먼저 내 아픔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 한마디만으로도 견딜 힘을 얻을 때가 있다.
오늘 욥에게는 그 한 사람마저 없는 것 같다. 욥은 친구들에게 애원한다.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재산도 잃고 자녀들도 잃고 자신의 몸마저 망가졌다.
위로해 주려고 찾아온 친구들마저 욥의 고통을 이해하기보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네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
욥에게는 육체의 고통만큼이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 컸을 것이다.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때로는 고통 그 자체보다 사람들의 판단이 더 아플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 어려움을 겪으면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조심했어야지.”
“다 이유가 있을 거야.”
틀리지 않지만 이미 아파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먼저 함께 아파해 주는 마음일 것이다.
욥은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기록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도 철필로 바위에 영원히 새겨 달라고 한다.
왜 그토록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을까. 아마도
“적어도 누군가는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아팠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던 바로 그 순간, 욥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나는 이 말씀에서 특히 ‘그러나’라는 말에 마음이 머문다.
모든 것을 잃었다. 친구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몸은 무너지고 있다. 기도의 응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구원자는 살아 계신다.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에 나온 고백이 아니다.
욥의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 잃었던 것이 돌아온 것도 아니다.
친구들이 갑자기 욥을 이해해 준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욥의 마음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달라진다.
자신의 고통보다 더 깊은 곳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상황이 좋아져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병이 나아야 감사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느끼며,
기도가 이루어져야 믿음이 강해진다.
그러나 욥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상황이 바뀌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믿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욥은 단순히 자신의 재산이 다시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분은 하느님이다.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처음 욥기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이 이제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입니다.”
여기에 욥기의 신앙이 조금씩 깊어지는 과정이 보인다.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을 감사했고, 그것을 잃었을 때에는 울부짖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졌다.
이제 욥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넘어 하느님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우리 삶에도 ‘그러나’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한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었던 사람에게 오히려 상처받을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해결된 다음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욥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도 된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도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신다.”
어쩌면 믿음이란 고통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그것이 마지막 말은 아니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그러나’는 무엇인가.
“힘들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고 그 문장의 마지막에 이것을 붙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의 상황은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이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앙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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