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미사 강론을 듣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는 이유
본문
“내가 자수하려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고,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따르려는 것이요.
어찌 이런 분을 배신하라고 합니까.”
천주교 박해 시절 목숨을 담보로 배교를 강요하는 현장의 모습들이다.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싶은 말이다.
신앙을 버리기만 하면 무서운 고문과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순교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신앙을 선택했다.
그분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고문이 아프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와 똑같이 두렵고 아팠지만, 그 고통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
나는 요즘 욥기를 읽으면서 순교자들의 삶과 욥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욥도 하루아침에 재산과 가족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병들어 가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라고 고백했지만, 욥 역시 끝까지 담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또 물었다.
하느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욥이 그렇게 울부짖으면서도
하느님께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의 위대함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끝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을 만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건강이나 가족 문제로 힘들 때도 있으며,
간절히 기도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계속되는가?”
“왜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가?”
때로는 하느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욥의 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신앙은 넘어지지 않는 힘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순교자나 욥의 고통과 비교하여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아픈 것은 나에게는 분명 아픈 것이다.
다만 그분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분들도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갔는데,
나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 보자.”
그것이 순교자의 삶과 욥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힘이 아닐까.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놓지 않았고,
욥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하느님께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모든 일이 잘되리라고 확신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잘되지 않아도 다시 일어서고,
응답이 들리지 않아도 다시 기도하며,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을 향한 끈을 놓지 않는 것.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 무엇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고 있는가?
순교자들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그리스도, 욥이 고통 속에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하느님.
그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삶의 시련 앞에서
넘어질 수는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고통이 없는 삶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이유를 잃지 않게 해 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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