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독서 말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제임스
2026-06-2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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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왕기 하권 19장의 이 말씀은 강대국 아시리아와 작은 나라 유다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교만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맞서는 이야기이다.
당시 아시리아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고, 누구도 그들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뒤 히즈키야에게 편지를 보내 조롱한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고, 누구도 그들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뒤 히즈키야에게 편지를 보내 조롱한다.
"너희 하느님이 너를 속이고 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구하지 못했는데,
너희 하느님이라고 다를 것이 무엇이냐?"
너희 하느님이라고 다를 것이 무엇이냐?"
인간의 눈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국력도 군사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예루살렘은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놓인 작은 배와 같았다.
국력도 군사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예루살렘은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놓인 작은 배와 같았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군사 회의를 먼저 열지 않았다.
외교적 계산부터 하지도 않았다.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는다.
외교적 계산부터 하지도 않았다.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는다.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다.
히즈키야는 문제를 손에 쥐고 끙끙 앓지 않았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하느님 앞에 그대로 가져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하느님 앞에 그대로 가져갔다.
그는 말한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이 기도에는 원망도 없고 허세도 없다.
단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내어놓는다.
단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내어놓는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다.
병원에서 예상치 못한 진단을 받을 때가 있다.
사업이 무너질 위기에 처할 때도 있다.
자녀 문제나 가족 갈등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제만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먼저 하느님께 가져갔다.
신앙은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를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성당의 신자가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며 절망했다.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매일 성당에 들러 조용히 기도했다.
병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병은 그대로 있었지만 마음은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히즈키야의 기도도 비슷하다.
기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리고 산헤립은 자신만만하게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사 전략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이다.
산헤립은 자신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역사의 주인은 결국 하느님이셨다.
역사의 주인은 결국 하느님이셨다.
오늘날에도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돈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며,
거짓과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힘이 역사의 마지막 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보다 느려 보일 수 있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산헤립의 편지'는 무엇인가?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가족의 걱정일 수도 있으며,
노년의 외로움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다.
히즈키야는 그 편지를 성전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어쩌면 신앙은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그 편지를 하느님 앞에 펼쳐 놓을 수 있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그 편지를 하느님 앞에 펼쳐 놓을 수 있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문제의 크기보다 하느님의 크기가 더 크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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