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본문
요한 1서 2장 3-11절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에게 오늘의 말씀은 지나온 신앙의 길을 조용히 비추어 주는 저녁빛처럼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집니다.
미사의 흐름도, 전례력도, 성경의 맥락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신앙을 다시 아주 단순한 자리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깊이 아는가’가 아니라 ‘여전히 지키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젊은 날 열심히 하던 것도 지나가고, 이제는 봉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수가 줄어드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계명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질문이 조용히 다가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나는 안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수많은 강론을 들었고, 수많은 성경 구절을 지나왔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이 말씀은 지식을 꾸짖는 말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낮추라는 초대처럼 들립니다.
오래 믿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젊은 신자의 신앙을 가볍게 여기고, 새로운 방식의 신앙 표현을 낯설어하며
마음을 닫고 있지는 않은지,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원로 신자의 신앙은 이제 설명으로 말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로 말합니다.
묵묵히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는 손길,
다툼을 피하고 말을 아끼는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 강론입니다.
원로 신자는 앞장서 이끄는 사람이기보다 길이 존재함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이 길을 이렇게 오래 걸어도 괜찮다”고 말없이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되새겼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원로 신자의 자리에서 사랑은 점점 더 어려운 계명이 됩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은 쉽게 상처받고, 세상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지금 이 나이에서야말로
가장 새롭게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요한은 신앙의 상태를 아주 단순하게 가릅니다.
사랑하면 빛,
미워하면 어둠.
원로 신자의 신앙도 결국 이 하나로 평가됩니다. 얼마나 오래 성당에 다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직책을 맡았는가가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가입니다.
젊은 신자의 서투름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교회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도 마음을 닫지 않는 것.
그것이 빛 속에 머무는 신앙입니다.
원로 신자는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요한 1서의 이 말씀은 원로 신자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제는 더 적게 말해도 괜찮다.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이 비치고 있다는 이 말씀은,
오랜 세월을 지나온 신앙의 끝자락에서 우리를 다시 빛 쪽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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