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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경 말씀] 맡겨진다는 것의 무게

제임스
2025-12-21 10:24 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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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마리아의 “예”를 다시 묻다


여러 단체의 장을 한꺼번에 다섯 개나 맡아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교수로서의 본분인 연구와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과제도 동시에 몇 개씩 수행하고 있었으니 하루가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전국가톨릭교수협의회 일 역시 공식적인 전면 역할이라기보다는, 뒤에서 실무를 챙기며 보조하는 정도라고 스스로 선을 긋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홍 신부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부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자네가 사무총장을 맡아 보아.”

순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일정표가 펼쳐졌다. 이미 빼곡한 시간표 위에 또 하나의 책임을 얹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무리였다.

“신부님, 지금 맡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감당할 형편이 아닙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웃으며 답하셨다.

“그럼 그냥 타이틀만 걸치고 있어.”

“아니, 그러면 운영이 제대로 안 될 텐데요.”

그때 돌아온 대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요.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해주실 테니까.”

그렇게 시작된 일이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어진 4년의 봉사였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신기한 시간이었다. 계획대로 된 것도 아니고, 내 능력으로 해결한 것도 아닌데, 큰 탈 없이 일들이 흘러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내가 한 일’이라기보다 ‘맡겨진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문득 이런 질문이 마음에 남았다.

왜 그 순간 나는 성모 마리아처럼 이렇게 응답하지 못했을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나는 늘 근거와 데이터, 재현 가능성과 시간 배분이라는 현실의 언어에 익숙했다. 무엇을 맡는다는 것은 곧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자원을 투입해야 하며, 실패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계산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성령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 앞에서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조건과 한계를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신앙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과학자의 습관적인 신중함 때문이었을까.

해마다 연말이 되면 신부님들께서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고 한다.

사목회장을 비롯한 여러 봉사 직책을 맡아 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들 바쁘고, 책임이 무겁고,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댄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 계산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은 나자렛으로 향한다.

정적 속에서, 한 처녀에게 전해진 천사의 말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정보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빛의 파장이 감각을 통과해 마음을 흔드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이 사건을, 마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과학은 말한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관찰과 실험, 검증을 통해 법칙 안에서 설명된다고. 현대 생명과학은 수정과 발생의 신비를 상당 부분 밝혀냈지만, 부모 없이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은 우리가 경험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현재의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곧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황한다.


과학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사건 앞에서, 마리아의 응답을 이해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흥미로운 점은, 마리아가 처음부터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묻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불신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자가 새로운 데이터 앞에서 던지는 질문과 닮아 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고백이면서도, 이해하려는 태도다. 천사는 그 질문에 대해 성령의 역사로 응답하고, 마리아는 그 설명을 완전히 이해해서가 아니라, 신뢰함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과학과 신앙은 갈라지기보다 묘하게 겹친다.

과학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처럼, 우리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우리의 측정 능력을 넘어서는 영역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한계는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겸손의 자리이며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다.

마리아의 “예”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한 뒤의 순종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여는 선택. 그것은 비이성적인 복종이 아니라, 미지 앞에서 취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름, 계산이 맞지 않는 요청, 시간표를 어지럽히는 사명 앞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응답하는가? 바쁨과 책임을 이유로 한 합리적 거절인가, 아니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이라는 조심스러운 신뢰인가.

연말의 분주한 회의실과 조용한 나자렛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계산과 맡김 사이에서, 마리아의 “예”는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

그 응답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함께 고민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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