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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경 말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시간에도 - 엘리사벳

제임스
2025-12-19 03:49 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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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가복음 1,5-25)에 대한 묵상 수필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적의 극적인 장면보다도 생명이 준비되는 시간의 깊이를 말해 주는 서사처럼 다가온다.
농업인의 눈으로 읽을 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는 실패와 결핍의 기록이 아니라,
오래 묵혀 두었던 토양이 마침내 깨어나는 과정에 가깝다.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은 흔히 불모의 상징으로 읽힌다
. 그러나 밭을 다루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나지 않는 시간은 곧바로 죽은 땅을 뜻하지 않는다. 농부는 안다. 땅은 쉬는 동안에도 일하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는 씨앗이 없고 싹이 보이지 않지만, 토양 속에서는 미생물이 균형을 되찾고, 유기물이 차곡차곡 쌓이며, 다음 계절을 위한 질서가 조용히 정돈된다. 엘리사벳의 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생명의 징후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비어 있던 시간이 아니라 준비되고 있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식품 과학에서 말하는 잠복기처럼, 변화는 이미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었으나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천사가 말한 때가 되면이라는 표현은 농업의 언어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씨앗은 아무 때나 뿌린다고 자라지 않는다. 기온과 습도, 토양의 상태가 서로 어우러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발효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재료는 아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나이는 인간의 계산으로 보면 이미 가능성을 넘어선 조건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시간으로 보면 오히려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을 수도 있다. 포도주가 이른 시기에는 거칠고 불안정하지만, 시간이 쌓인 뒤에야 깊고 단단한 맛을 내듯, 이 부부의 삶 역시 충분히 숙성된 뒤에야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즈카르야가 성소에서 맡았던 분향의 장면 또한 식품 과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의미심장하다. 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 전체를 바꾼다. 그것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휘발성 분자가 공기 중으로 퍼지며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자극하는 신호다. 자연계에서도 중요한 변화는 종종 이렇게 보이지 않는 신호에서 시작된다. 호르몬이나 미량의 화학 물질이 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즈카르야가 향을 피우고, 백성들이 밖에서 기도하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백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 틈에서 생명의 방향은 이미 조용히 바뀌고 있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장면은 과학자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조건이 맞지 않는데 결과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주어진 침묵은 벌 이라기 보다 하나의 조치처럼 느껴진다. 발효 중인 용기를 자꾸 열어보면 과정이 망가지듯, 토양을 계속 뒤집으면 뿌리가 내릴 수 없듯, 생명에는 외부의 간섭이 멈추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즈카르야의 침묵은 말을 잃은 시간이 아니라,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나는 과정을 그대로 맡기는 법을 배워 갔다.

 

     태어날 아이 요한에 대한 예고 역시 식이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는 삶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감각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는 환경 설계다. 식품 과학은 태중의 환경과 초기 식이가 한 사람의 미각과 대사, 신경계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요한은 세상의 자극에 길들여지지 않은 감각으로,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된 생명이었다. 농업에서도 때로는 비료를 줄이고 스트레스를 주어야 향과 성분이 더 농축된다. 요한의 삶은 그런 방식으로 빚어진 생명이었다.

마침내 엘리사벳의 고백이 이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셨다.” 이 말은 농부가 오랜 흉작 끝에 처음 수확을 손에 쥐는 순간과 닮아 있다. 그동안의 침묵과 기다림, 설명할 수 없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의미를 얻는다. 실패처럼 보였던 시간은 사실 준비의 시간이었고, 비어 있던 계절은 다음 생명을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급해 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하느님의 일이 멈춘 것은 아니라고. 토양이 가장 조용해 보이는 겨울에도 뿌리는 깊어지고, 발효가 가장 느리게 진행되는 순간에 향은 가장 많이 쌓이듯, 우리의 삶 또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사라진 즈카르야의 시간처럼, 설명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자리에서 생명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계절에도 하느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드러남이 없다고 해서 부재는 아니며, 기다림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오늘도 조용히 말한다
.
생명은 준비되고 있고, 때가 차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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