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예수님의 족보 : 이어짐의 힘 — 발효가 멈추지 않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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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식품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 중 하나는 발효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더디고, 때로는 냄새도 거칠며, 중간 과정은 불완전해 보인다.
그러나 미생물의 사슬이 한 번 끊기지 않고 이어지면, 결국 전혀 새로운 맛과 생명이 탄생한다.
예수님의 족보도 그렇다. 아브라함에서 이사악으로, 야곱에서 유다로,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 사슬은 완벽해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중간에는 배신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고, 도덕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있었다.
마치 발효 중에 온도가 흔들리고, 산도가 불안정해지는 순간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보는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과정을 폐기하지 않으셨다.
식품을 만들다 보면 깨닫는다. 완벽한 원료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이어지느냐, 끊기느냐라는 사실을.
이 족보는 하느님의 구원이 ‘무균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발효조 안에서 인내하며 숙성된 결과임을 말해준다.
족보 속에 등장하는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정통 혈통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오히려 제거되었어야 할 이름들이다.
마치 식품 공정에서 관리되지 않은 미생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품의 세계에서는 안다. 모든 ‘비정형적 존재’가 해로운 것은 아니다.
와인의 풍미를 결정짓는 토착 효모, 김치의 깊은 맛을 만들어내는 지역 미생물처럼 경계 밖의 요소들이 오히려 정체성을 완성하기도 한다.
마태오는 이 이름들을 삭제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구원은 표준화된 공정이 아니다.” 이방인과 여성, 상처와 낙인이 구원의 계보에서 오히려 풍미를 더하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사실.
이는 우리가 쉽게 배제해 온 삶의 조각들이,
하느님 안에서는 결코 불순물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족보 한가운데에는 ‘바빌론 유배’라는 단어가 놓여 있다.
민족의 자존이 무너지고, 뿌리가 뽑힌 시간.
식품으로 비유하자면, 원치 않던 장기 저장의 시간이다.
저장은 종종 품질 저하를 동반한다.
향이 날아가고, 조직이 무너지고, 본래의 모습이 흐려진다.
그러나 어떤 식품은 저장 중에 오히려 깊어진다.
치즈와 된장처럼, 시간의 압박 속에서 본질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의 유배 역시 그러했다.
겉으로는 실패였지만, 그 시간은 정체성과 신앙이 재정립되는 숙성의 기간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설명되지 않는 ‘유배의 시간’이 있다.
계획이 중단되고, 방향을 잃은 채 버텨야 하는 시기.
이 족보는 그런 시간을 향해 말한다.
“그 시간도 계보에서 빠지지 않았다.”
요셉까지는 “낳고, 낳고” 이어지던 사슬이 예수님 앞에서 끊어진다.
식품 공정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아무리 기술을 다해도,
어느 단계에서는 인간의 손을 넘어서는 반응이 일어난다.
효소의 작용, 미생물의 선택, 자연의 개입.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그 지점이다.
인간의 계보는 여기까지였고, 그 다음은 은총의 개입이었다.
이 긴 이름의 열거는 말한다. 삶은 단절처럼 보여도 이어지고 있다.
실패는 폐기 사유가 아니며 기다림은 숙성일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완전한 재료를 버리지 않으신다.
식품을 다루는 사람에게 이 족보는 낯설지 않다.
좋은 맛은 완벽한 원료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시간, 인내, 그리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이 족보는 결국 우리 각자의 삶을 향해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과정 속에 있는가?
혹시 아직 숙성 중인 것은 아닌가?”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 삶의 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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