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깨끗해진 입술, 같은 어깨
제임스
2025-12-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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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연말이 되면 마음이 묘하게 바빠진다.
달력은 얇아지고, 사람들은 새해 계획을 이야기하며 “이제는 새로 시작해야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그러나 내 마음은 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마치 12월 31일 다음에 곧장 1월 1일로 건너뛰지 못하고,
달력에는 없지만 마음 안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하루—‘12월 32일’에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마치 12월 31일 다음에 곧장 1월 1일로 건너뛰지 못하고,
달력에는 없지만 마음 안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하루—‘12월 32일’에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요 며칠, 별의 〈12월 32일〉을 듣다가 스바니야 예언서 말씀(3,1-2.9-13)을 다시 펼쳐 들었다.
노래는 “끝나지 않은 하루”를 품고 있고, 예언서는 “정화된 날”을 약속한다.
하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을 열고 새 숨을 들이마시게 하는 하느님의 손길이다. 두 세계가 내 안에서 조용히 겹쳤다.
노래는 “끝나지 않은 하루”를 품고 있고, 예언서는 “정화된 날”을 약속한다.
하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을 열고 새 숨을 들이마시게 하는 하느님의 손길이다. 두 세계가 내 안에서 조용히 겹쳤다.
스바니야는 먼저 도성을 향해 아픈 진단을 내린다.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그리고 더 결정적인 말이 이어진다.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도성’이 꼭 먼 옛날의 도시만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안에도 작은 도성이 하나 있다.
말은 많은데 듣지는 못하고, 판단은 빠른데 교훈은 천천히 받아들이며,
주님께 가까이 가기보다 내 논리와 내 체면과 내 상처의 언어에 더 익숙한 내 마음의 도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서로를 밀치고, 억압하고, 정당화하는 소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그리고 더 결정적인 말이 이어진다.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도성’이 꼭 먼 옛날의 도시만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안에도 작은 도성이 하나 있다.
말은 많은데 듣지는 못하고, 판단은 빠른데 교훈은 천천히 받아들이며,
주님께 가까이 가기보다 내 논리와 내 체면과 내 상처의 언어에 더 익숙한 내 마음의 도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서로를 밀치고, 억압하고, 정당화하는 소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입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입술은 작은 기관이지만, 인생을 흔드는 가장 큰 도구이기도 하다.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입술에서 나오고,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도 입술에서 나온다.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내 의로움만 증명하려 했던 말들,
상대를 가르치려는 듯하면서도 내 마음의 불안과 우월감을 감춘 말들,
그리고 침묵으로 상대를 벌주던 날카로운 입술의 선택들—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더럽혀진 도성’을 만들었던 재료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약속은 벌만이 아니었다.
정화는 단지 “더럽다”는 판결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입술을 깨끗하게 하신 뒤, 그 다음 장면을 보여 주신다.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나는 이 구절에서 멈추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려고 말할 때, 사실은 어깨를 맞대기보다 상대를 밀어내는 경우가 많다.
말이 많아질수록 거리는 더 멀어진다.
그런데 하느님은 ‘입술의 정화’를 ‘어깨의 연대’로 이어 주신다.
말이 깨끗해지면, 사람은 다시 같은 방향을 보게 되고, 서로의 짐을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뜻처럼 들렸다.
연말의 노래 〈12월 32일〉이 떠올랐다.
그 노래가 주는 슬픔은 울부짖지 않는다.
억지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하루 더 머물 자리를 조용히 마련해 준다.
스바니야의 약속도 어쩌면 그렇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 때,
그것은 당장 모든 것을 말끔히 끝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따라잡을 시간을 내가 마련해 주겠다”는 은총일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는 늘 12월 32일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미안해지고, 진심으로 다시 가까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익어 가는 시간.
하느님은 그 시간을 건너뛰지 않으신다.
그 노래가 주는 슬픔은 울부짖지 않는다.
억지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하루 더 머물 자리를 조용히 마련해 준다.
스바니야의 약속도 어쩌면 그렇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 때,
그것은 당장 모든 것을 말끔히 끝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따라잡을 시간을 내가 마련해 주겠다”는 은총일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는 늘 12월 32일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미안해지고, 진심으로 다시 가까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익어 가는 시간.
하느님은 그 시간을 건너뛰지 않으신다.
“그날에는 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 구절은 회개를 ‘수치’가 아니라 ‘해방’으로 바꾼다.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는 일을 종종 자존심의 패배로 여기지만,
하느님 안에서 그것은 오히려 짐을 내려놓는 순간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고 하신다.
내 안의 ‘거만함’도 그런 것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면 내가 무너질까 두려워서, 먼저 웃어 버리고, 먼저 합리화하고,
먼저 남 탓으로 돌려 버리는 거만한 방어.
하느님께서 치워 버리시는 것은 어쩌면 나를 상처 내는 내 방어기제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참 아름답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여기서 ‘가난’은 단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하지 못하는 상태, 더 이상 말로 자신을 꾸미지 못하는 상태,
결국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상태.
신앙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들고,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여기서 ‘가난’은 단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하지 못하는 상태, 더 이상 말로 자신을 꾸미지 못하는 상태,
결국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상태.
신앙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들고,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마지막의 풍경은 마치 평화로운 목초지 같다.
위협이 사라지고, 마음이 눕는 자리.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입술이 깨끗해진 사람’은
결국 ‘쉬어도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다.
늘 자신을 증명하느라 긴장하던 삶에서,
늘 상대를 이기려 하던 삶에서, 늘 불안 때문에 말을 덧붙이던 삶에서—
하느님께 피신하는 사람은 마침내 “몸을 누일” 수 있다.
신앙의 끝은 어쩌면 그 휴식일지 모른다.
마지막의 풍경은 마치 평화로운 목초지 같다.
위협이 사라지고, 마음이 눕는 자리.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입술이 깨끗해진 사람’은
결국 ‘쉬어도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다.
늘 자신을 증명하느라 긴장하던 삶에서,
늘 상대를 이기려 하던 삶에서, 늘 불안 때문에 말을 덧붙이던 삶에서—
하느님께 피신하는 사람은 마침내 “몸을 누일” 수 있다.
신앙의 끝은 어쩌면 그 휴식일지 모른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회개는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한 가지다.
입술을 조금 더 깨끗하게 두는 것.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듣는 것.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자리를 먼저 찾는 것.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이 입술에 머물지 않도록, 실제로 주님께 한 걸음 가까이 가는 것.
어쩌면 한 가지다.
입술을 조금 더 깨끗하게 두는 것.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듣는 것.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자리를 먼저 찾는 것.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이 입술에 머물지 않도록, 실제로 주님께 한 걸음 가까이 가는 것.
연말의 공기 속에서, 나는 마음속 ‘12월 32일’을 조용히 건넌다.
그 하루는 후회와 미련을 붙잡는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연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내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때,
나 역시 누군가의 어깨 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위협도 없는 자리에서
풀을 뜯고 몸을 누이는 평화를 배우기를.
그 하루는 후회와 미련을 붙잡는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연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내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때,
나 역시 누군가의 어깨 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위협도 없는 자리에서
풀을 뜯고 몸을 누이는 평화를 배우기를.
그것이 스바니야가 보여 준 ‘남은 자’의 길이고,
내가 새해로 건너가며 꼭 붙잡고 싶은 은총의 방향이다.
내가 새해로 건너가며 꼭 붙잡고 싶은 은총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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