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광야라는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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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광야는 생명이 사라진 곳이 아니라, 대사가 멈춘 상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을 우리는 흔히 ‘죽은 땅’이라 부른다.
그러나 식품과 생명을 연구해 온 사람의 눈으로 보면,
광야는 죽음이라기보다 대사가 극도로 느려진 상태에 가깝다.
수분이 부족하고, 효소 반응이 억제되며, 미생물의 활동이 최소 수준으로 내려간 환경.
즉,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잠시 숨을 낮춘 상태다.
이사야 예언자가 바라본 광야는 바로 그런 곳이다.
그래서 그는 광야를 꾸짖지 않고, 그곳을 향해 뜻밖의 말을 건넨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이 말은 환경이 바뀐 뒤의 결과를 노래하는 문장이 아니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고, 땅은 여전히 갈라져 있다.
그럼에도 기뻐하라는 이 선언은 광야가 이미 회복의 방향으로 들어섰다는 신호다.
씨앗은 싹을 틔우기 전,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분해한다.
저장된 전분은 당으로 쪼개지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풀어진다.
겉으로 보면 이는 붕괴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분해가 없으면 새로운 조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광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은 사실 씨앗이 가장 깊이 작동하는 시간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씀은 곧바로 인간의 몸으로 시선을 옮긴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이는 의지나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맥이 풀린 손은 에너지원이 고갈된 근육의 상태다.
꺾인 무릎은 더 이상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다.
식품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영양과 회복 시스템이 붕괴된 몸이다.
그런 몸에 필요한 것은 채찍질이 아니라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발효가 그렇다.
콩을 삶아 그대로 두면 썩지만, 적절한 미생물을 만나면 몸을 살리는 음식으로 바뀐다.
조건 하나가 다를 뿐인데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느님의 회복도 이와 닮아 있다. 사람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내부 환경을 바꾸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은 위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발효조 안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온도 하나, 습도 하나만 어긋나도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발효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미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는 기적의 나열이 아니라 회복의 생리학적 순서처럼 보인다.
눈먼 이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의 귀가 열리며, 말못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린다.
이는 기능의 추가가 아니라 기능의 재가동이다.
막혀 있던 감각 통로가 다시 열리고, 차단되었던 신호 전달이 회복되며, 침묵 속에 머물던 존재가 다시 자기 목소리를 갖는다.
발효 식품이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되살리듯, 이 회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그저
“살아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방된 이들이 시온으로 돌아온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끝없는 즐거움이 머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쁨이 잠깐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효를 거친 음식은 쉽게 상하지 않는다. 시간을 견디며, 오히려 맛이 깊어진다.
광야를 통과한 기쁨도 그렇다.
이 기쁨은 조건이 좋아서 생긴 감정이 아니라,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조직된 삶의 결과다.
그래서 슬픔과 탄식은 억지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준다.
광야는 생명이 없는 곳이 아니다.
광야는 생명이 다시 대사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태다.
아직 향은 올라오지 않았고, 아직 꽃은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서는 이미 분해와 전환과 재구성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수선화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되돌릴 수 없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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