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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서 3장을 쓰면서] 보이지 않는 향기의 비밀을 따라가는 길

제임스
2025-12-13 08:55 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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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발효창고 안은 늘 고요하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밀어주고, 양보하며 새로운 향을 짜내고 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세월을 머금어 마침내 깊은 맛을 만들어낸다.

나는 에페소서 3장을 읽을 때마다 늘 이 발효의 장면이 떠오른다.
바오로가 비밀이라고 부른 그 무엇,
세대와 세대를 지나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질서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감춰진 질서가 빛 속으로 나올 때

 

바오로는 계시로 이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말은 마치 연구자의 눈앞에 처음으로 첨단 분석기기의 분석결과가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과도 같다.
오랫동안 찾고 있던 향미의 근원이 여기 있었구나하고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말이다. 하지만 그 계시는 화려한 폭죽처럼 터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된장이 숙성되는 동안 서서히 색이 깊어지고, 향이 차분히 퍼지는 과정에 더 가깝다.

하느님의 비밀은 그렇게 천천히, 마음의 조용한 틈을 통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온다.

 

서로 다른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미가 되는 일

 

바오로가 말한 또 하나의 비밀은
유다인과 이방인,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식품의 세계도 늘 이런 조화의 법칙을 증언한다.
아무리 훌륭한 향미 성분이라도 혼자서는 맛을 완성할 수 없다.

짠맛이 단맛을 돋워 주고,
신맛이 고기의 풍미를 깨어나게 하고,
지방이 향을 감싸 부드럽게 운반한다.

발효 과정에서 서로 다른 미생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향을 만들면서도 결국
하나의 풍미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듯,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다름의 조화를 통해 완성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
서로의 부족함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배려가 그 나라의 맛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가 삶을 지탱하듯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감각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입자들, 미생물, 분자들로부터 온다.

사람들은 그 작은 실체들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음식도, 풍미도, 생명도 사라질 것이다.

바오로가 말한 하느님의 비밀도 이와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미 조용히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은총,
그것이 때가 되면 삶의 향기가 되어 드러난다.

마치 오랜 숙성 끝에 된장의 향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보이지 않는 손길 속에서 서서히 익어 가는 것이다.

 

사랑이 뿌리를 내리고, 삶이 깊어지는 과정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 마음에 굳건히 자리 잡기를.”
바오로의 이 기도는 마치 씨앗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갑자기 큰 나무처럼 자라지 않는다.
햇살을 조금씩 모으고,
비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밤의 적막을 견디는 뿌리의 힘을 통해 서서히 커진다.

우리 삶도 그렇다.
인내와 배려, 용서와 연민 같은 작은 선택들이
마치 미세한 발효 성분처럼 쌓여 삶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우리가 그 과정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문득 뒤돌아보면
마치 오랜 숙성의 맛처럼 우리 안에 담백한 넉넉함이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보다 더 깊고 넉넉한 은총

 

바오로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해주시는 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발효 음식의 신비를 떠올린다.

과학자는 모든 조건을 통제하려 해도
결국 미생물과 시간은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선물을 준비한다.

기대보다 깊은 향,
예상보다 넉넉한 풍미,
시간이 만든 온기의 맛.

하느님이 우리 삶에 베푸시는 은총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의 좁은 계산을 넘어서
생각보다 더 넓게, 더 부드럽게, 더 풍성하게 흘러오는 선물.

바오로는 그 흐름을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삶이 숙성되며 스스로 낸 향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의 발효창고다

 

발효창고의 불은 낮고, 공기는 고요하며, 그 안에서 향은 천천히 태어난다.

우리 마음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조각의 은총이
오늘의 선택을 바꾸고, 작은 용서 하나가 내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지난날의 슬픔마저 새로운 향으로 익어 간다.

에페소서 3장은 그 모든 과정을 하느님의 비밀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비밀은 오늘도 우리 삶의 작은 틈을 통해
조용히, 은근하게, 향기처럼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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