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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경 말씀] 여물어 가는 은총의 시간

제임스
2025-12-06 07:55 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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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30,19-26과 음식의 신비에 대한 묵상 수필


나는 농생대를 졸업했다.
그 시절 강의실 창밖으로 보이던 논과 밭,
바람에 흔들리는 이삭들의 물결,
그리고 가을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익어가던 들판의 풍경은
지금도 가끔 내 마음의 먼 곳에서 은은한 그리움처럼 울린다.

농업을 공부했다는 것은 단순히 식물·토양·기후 같은 지식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자연이 움직이는 호흡과 리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법,
그리고 농부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가뭄이 오래되면 먼저 갈라지는 것은 흙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논둑처럼
농부의 마음도 갈라지고 말라갔다.
그럴 때 빗소리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마치 오랜 침묵 끝에 들려오는 하늘의 응답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장면이 있다. 며칠 째 목 마르던 땅에
갑자기 하늘 문이 열린 듯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동네의 한 어르신이 마당으로 황급히 뛰어나와 젖어 드는 옷도 잊은 채 두 팔을 치켜 들고
하늘을 향해 긴 목소리로 외쳤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모습은 내게 오래 남았다. 종교가 무엇인지, 어떤 신을 믿는지가 중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분의 두 팔은 하늘을 향했지만, 그 감사는 사실 땅에게 보내는 인사이자 땅 위에 사는 생명 모두를 향한 고백이었다.

“살았습니다.”
그 말이 비 속에 녹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본래 비가 귀한 땅이었다. 한 번 비가 늦어지면
흙은 금세 갈라져 마치 오래된 항아리처럼 금이 가고,
곡식은 속을 채우지 못한 채 웅크린 어깨처럼 허리를 굽혔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던 비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료(生命料)였다.
오늘 우리의 식탁을 지탱하는 수고와 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길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절박함이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백성에게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눈물이 마른다는 것은 그저 슬픔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내일의 밥상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고,
메말라 가던 희망의 뿌리에 다시 물이 스며든다는 뜻이다.

곡식이 다시 여물고, 포도나무 끝에 작은 새순 하나가 돋을 때
농부는 울음 대신 미소를 짓는다.
이사야는 바로 그런 미소를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은 이런 다정한 예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사야는 이어서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이라는 다소 거친 이미지를 꺼낸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빵과 물을 마주하는 날이 있다.
입은 움직여도 마음은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식사,
밥상을 받아들었지만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기조차 힘들던 순간들.
음식이 입 안에서 흩어지고 있는데 영혼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떨고 있는 순간들.

그런 날들을 이사야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이 침묵으로 가르치시는 시간이라고 한다.
곡식도 한 번의 햇빛으로는 여물지 않는다.
뜨거운 낮과 차가운 밤,
안개와 이슬,
그리고 바람의 손길이 겹겹이 쌓여야 비로소 알찬 알맹이가 된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드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씀은 놀라운 전환을 맞는다.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하느님을 뵙는다는 표현은 대개 성전이나 기도실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은 우리 일상의 가장 작은 자리에서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하루를 마치고 밥상을 정리하는 순간, 접시에 남은 밥풀을 닦아내는 조용한 손짓,
흐르는 설거지 물 위에 흔들리는 작은 빛 그 사이에서 문득
“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침 햇빛이 쌀알 하나에 닿아 작은 별처럼 반짝일 때,
그 빛을 바라보며 알 수 없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스승의 얼굴을 뵈는 시간 아닐까.

이사야가 말한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소리보다 조용하고, 단어보다 넓은 언어다.

어쩌면 그 음성은 바람결에 스치는 이삭의 소리,
물속에서 은은히 흔들리는 달빛,
뜨거운 국물 위에 올라오는 김의 향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음성은 

“이리로 가거라” 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다시 바른 길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안내자다.


이 말씀은 이제 농경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씨앗이 여문다’는 표현은 식품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특별한 말이다.
여문 곡식만이 분말을 냈을 때 고운 가루가 되고, 그 가루로 빚은 빵과 면이
풍미와 구조를 갖추게 된다.

곡식이 여물지 않으면 밥상 위의 기쁨도 여물지 못한다.

하느님의 돌보심은 성경 속의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곡식이 알차게 속을 채우도록 비를 내려 주시는 것처럼
일상의 틈새에 스며드는 섬세한 사랑
이다.


우리 영혼도 
그런 비를 맞으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여물기 시작한다.

가축이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소와 나귀가 잘 다듬은 사료를 먹는다는 표현은
하루의 생태계 전체가 새로운 균형 속에서 숨을 되찾는 풍경이다.

한 사람의 마음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 생활, 일상—
그 모든 것이 함께 회복되는 그림이다.
우리의 식탁도 이런 회복의 질서를 닮아야 한다.

땅이 건강해야 곡식이 여물고, 곡식이 건강해야 우리 몸과 영혼이 평화를 누린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은 가장 찬란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주님께서 상처를 싸매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지리라.”

달빛이 햇빛처럼 된다는 말은 그냥 밝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를 지나온 마음이 다시 빛을 품게 되는 변화를 의미한다.
슬픔을 거친 영혼만이 이해하는 깊고도 단단한 빛.

삶의 한가운데에 있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언하는,
아주 묵직한, 그러나 따뜻한 빛이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다시 밥상을 차리고,
누군 가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된다.
바람에 쓰러졌던 이삭도 햇빛과 비를 다시 받아 일어서듯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다시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의 말씀은 조용히 우리에게 속삭인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삶을 다시 여물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여무는 과정은 비처럼 조용하고, 햇빛처럼 따뜻하며, 때로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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