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잇는 불, 성령의 불씨
본문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웠던 어린 시절, 나는 친구와 함께 성당으로 향하곤 했다.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종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미사 중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나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올랐다.
모두가 제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모실 때,
나와 내 친구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느꼈던 것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성체에 대한 목마름,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갈망이었다.
‘언젠가 나도 그분을 내 마음 안에 모실 수 있겠지.’
그 마음 하나로 새벽마다 미사에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첫영성체를 하던 날,
나는 온몸을 감싸는 듯한 뜨거운 불길을 느꼈다.
마치 내 영혼의 중심에 하느님의 불씨가 내려앉은 것처럼.
그날 이후,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실 때면
그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듯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음을 증언하는 체험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이였던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녀가 미국에서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성당 제대 앞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손녀는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마치 작은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엘레노아, 너도 분명 그 뜨거운 불을 느꼈을 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손녀의 눈빛 속에서 분명히 그 불을 보았다.
하느님께서 세대와 언어, 국경을 넘어
같은 불씨를 이어주고 계심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 불은 단지 신앙의 기억이 아니라,
삶 속에서 희생과 사랑, 나눔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신앙 유산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그 불은 성당 제대에서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가정의 식탁 위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향한 손길 속에서도,
그리고 손녀의 순수한 기도 속에서도 다시 불붙는다.
딸이 첫영성체를 하던 날은 공교롭게 내가 첫영성체를 하였던 날이기에 선명히 기억난다.
그날, 작은 흰 드레스를 입고 두 손을 모은 딸의 모습은
이제 손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때도 나는 제대 옆에서 두 손을 모은 채 미소를 지었다.
성체를 모시는 딸을 바라보며
내 안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하느님께서는 가정 안에서 신앙의 불을 세대마다 새롭게 붙이신다.
불은 옮겨질 때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곳에서 더 환하게 타오른다.
손녀에게 옮겨진 신앙의 불씨는
또 다른 세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나는 여전히 기도하며 작은 나무 조각 하나라도 더 보태고 싶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3)
그 ‘은사’는 하느님께서 세대마다 새롭게 주시는 선물이다.
신앙은 피처럼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모범으로 전해지는 불빛이다.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
성실히 살아가는 어른의 땀방울,
감사하는 식탁의 기도 한마디가
아이들에게는 곧 하느님의 불을 전해주는 불씨가 된다.
신앙의 전승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불빛의 전달이다.
오늘 나는 내 안에서 여전히 타오르는 불을 느낀다.
그 불은 나를 뜨겁게 만들고, 때로는 눈물 나게 한다.
그러나 그 불이 있기에 나는 살아 있고,
그 불이 있기에 손녀의 세대도 희망으로 빛난다.
“주님, 이 불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 가정 안에, 저희 자손의 마음 안에
성령의 불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소서.”
"그 불로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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