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화해와 안식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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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끝자락, 문득 내 삶을 돌아보면 크고 작은 흠들이 참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기억, 욕심 때문에 양보하지 못했던 순간들, 그리고 마음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교만과 불안까지. 그런 것들을 마주할 때면 “과연 내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곤 합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제 귀에 들려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 1,22)
거룩함은 내가 애써 흠을 지워내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이 깨달음은 나를 과거의 상처와 죄에 묶여 있던 존재에서 풀어내어, 은총 안에서 새롭게 서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순교자들이 간단한 말 한마디로, 배교의 선언 한 줄로, 고통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벗겨지는 잔혹한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힘은, 아마도 자신들이 더 이상 죄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은총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주님의 자녀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미 화해된 이들이었기에,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하신 말씀 또한 이 화해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멈추고 규정을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참된 쉼과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분 안에서, 나는 얽매임이 아닌 해방을, 율법의 무게가 아닌 생명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흔들리고, 자주 ‘나는 부족하다’는 자책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런 우리를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세우는 힘이 됩니다.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조차 담대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지상의 고통을 초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매일의 삶을 자유와 평화로 물들이며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결국 신앙이란 억지로 거룩한 체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화해와 자유를 받아들이고 그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화해와 안식의 자유는 오늘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정신을 되새김으로써,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쉼과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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